독립운동가 이봉창

출생과 성장

이봉창 의사는 1901년 8월 10일 경성부(京城府) 용산구(龍山區) (지금의 서울 용산구)에서 아버지 이진구(李鎭球 또는 鎭奎)와 어머니 손씨 사이에서 세 아들 가운데 둘째로 태어났다. 8세 때부터 금정에 있는 서당에서 3년간 한문을 배운뒤 11세 (1911년)에 천도교에서 세운 서울 용산 문창학교(文昌學校,4년제)에 입학하여 15세에 졸업 하였다.

이봉창의 가정은 처음에는 유복했으나 13세 되던 때부터 집안 형편이 급격히 어려워졌다. 이 때문에 이봉창은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일본인이 운영하는 와다에이세이도(和田衛生堂) 과자점의 점원으로 들어가 17세 때까지 일하였다. 그 후 좀 더 나은 수입을 위해 한강통(漢江通, 지금의 한강로)에 있는 무라타 약국 점원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19세 되던 1919년 8월 용산역의 임시 인부가 되었다. 1920년 1월에는 용산역의 역부(驛夫)가 되었고, 2월 전철수(轉轍手)가 되었으며, 10월에는 연결수(連結手)가 되었다.

평범한 삶에서 민족 차별에 눈을 뜨다

이봉창은 1919년 당시 생계를 꾸리느라 3.1운동 등 항일독립운동에 직접 참여하지 못했으나, 실제 삶의 현장에서 일본이 내건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의 헛된 실상을 뼈아프게 느꼈다. 용산역에서 일을 시작한지 1년쯤 됐을 때부터 승급과 봉급 등 모든 면에서 일본인과 조선인에 대한 차별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그래서 1924년 4월 사직원을 제출하고, 그 해 9월 금정청년회(錦町靑年會)를 조직하여 간사를 맡아 공공 봉사활동을 벌였다.

1925년 11월 이봉창은 조카딸의 도움으로 경성을 떠나 오사카(大阪)로 향하면서 국내보다 더 나은 사회적 환경을 기대하였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취업은 쉽지 않았고, 천신만고 끝에 1926년 2월 오사카 가스회사에 취직을 했다. 이 때부터 당시 조선인들이 일본에서 일본식 이름을 쓰고 있는 관례를 따라, 이봉창이라는 조선이름 대신 기노시타 마사조(木下昌藏)라는 일본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일본에서 조선인에 대한 차별은 더욱 심하였다. 이봉창이란 이름으로 일할 때와 기노시타 마사조라는 일본 이름으로 일할 때의 임금과 승급 등에 차별이 매우 분명했으며, 심지어 가스회사를 그만둔 뒤 부두노동자로 힘든 막일을 할 때도 조선인과 일본인의 차별은 더욱 뚜렷했다.

차별과 수모, 그리고 싹트는 항일 의식

이봉창이 일본에서 겪은 차별은 1928년 11월 7일 일왕 히로히토의 즉위식을 구경하러 교토에 갔을 때였다. 당시 그는 스미토모 신동소 아마가자키 출장소의 상용인부로 일을 하고 있을 때였다. 이봉창은 교토에서 일왕인 히로히토의 즉위식이 거행된다는 소식을 듣고, 이 광경을 구경하고자 아마가자키를 떠나 오사카를 거쳐 교토에 도착했다. 그런데 이곳에서 한글로 된 편지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일본 경찰의 제지를 받고 9일간 유치장에 갇혀 지냈다. 이 과정에서 이봉창은 조선인이 겪는 차별과 수모의 실상을 더욱 실감했고, 이 때의 경험은 후일 항일의식과 독립사상으로 표출되었다.

이봉창은 일본 이름을 사용하며 2년간 일본에서 생활하는 동안 조선인에 대한 일본인들 의 차별을 목도하며 침묵할 수 밖에 없었던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였다. 그 즈음에 중국 상해에는 영국 전차회사가 조선인을 우대하며, 또한 그곳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어 조선인들을 도와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결국 조선인 이봉창으로 떳떳하게 살수 있는 길을 찾아 1930년 12월 중국 상해로 발길을 옮겼다.

김구와의 만남, 한인애국단 제1호 단원이 되다

1930년 12월 6일 이봉창은 일본을 떠나 10일 상해에 도착했다. 1931년 1월 초 대한민국 임시정부 겸 민단사무소를 처음 찾아갔으며, 명화철공소에 취직한 후 3월에 다시 찾아갔다. 이 시기 이봉창은 김구(金九)와 대면하면서 독립운동의 의지를 키워갔으며, 일왕폭살 계획을 추진하였다. 또한 수류탄은 중국군으로 근무하는 왕웅(王雄, 金弘壹의 중국이름)에게 부탁해 상해공병창에서 1개를 구하였고,김현(金鉉)으로부터 수류탄 1개를 입수하였다.

의거를 앞둔 이봉창은 1931년 12월 13일 양손에 수류탄을 들고 태극기를 배경으로 한인애국단 제1호 단원으로서 비장한 결의를 다졌다.

이봉창 의사의 의거와 그 영향

선서식을 마친 뒤 이봉창은 12월 17일 일본으로 향하였다. 12월 19일 밤 고베(神戶)항에 도착한 뒤 오사카를 거쳐 22일에 동경에 도착하였고, 여관에 머물면서 이봉창은 일왕 폭살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12월 28일 신문에서 일왕이 1932년 1월 8일 동경 교외의 요요기(代代木) 연병장에서 거행되는 육군 시관병식(始觀兵式)에 참석한다는 기사를 보고, 그 날을 거사일로 계획하였다.

이봉창은 1932년 1월 8일, 동경 요요기(代代木) 연병장에서 관병식을 끝내고 경시청 앞을 지나가는 일왕 히로히토를 향해 수류탄을 던졌다. 그러나 수류탄의 위력이 약했고, 또 명중을 시키지는 못하고 체포되었다. 이 사건으로 일본정계가 크게 동요했으며 다수의 경호 관련자가 문책당하였다.

이후 그는 토요다마 형무소에 수감되어 그 해 9월 30일 재판에서 전격적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1932년 10월 10일 오전9시 2분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당시 일본은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침략을 본격화 하였으며, 1931년 7월2일에 발생한 만보산(萬寶山)사건을 크게 확대하여 한국인과 중국인의 민족간 반목을 조장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이봉창의 거사가 알려지자 중국의 각 신문들은 이 사실을 대서특필하였다. 특히 중국 기관지인 (국민일보)는 “한국인 이봉창이 일황을 저격했으나 불행히도 명중시키지 못하였다”고 보도하여 모든 중국인의 간절한 항일정신을 대변하여 주었다. 또한 이봉창 의사 의거 이후 만보산 사건으로 인한 한중 민족간의 감정대립이 크게 완화되었으며, 중국정부의 임시정부에 대한 관심과 함께 적지 않은 경제적 지원을 받게 되었다. 이로써 당시 활동이 부진했던 임시정부는 활기를 되찾았으며, 독립운동자금의 모금도 활발해졌다. 이봉창 의사의 의거는 윤봉길 의사 의거를 비롯한 항일투쟁의 도화선이 되어 훗날 광복군 창설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상훈과 추모

이봉창 의사가 순국하자 상해의 민단(民團)은 1932년 10월 15일 오전6시 추도식을 극비리에 거행하였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 순국열사에 대한 추모열기가 일기 시 작하였고, 1945년 12월 23일에 순국선열 추념대회가 서울운동장에서 열려 이봉창을 비롯한 선열의 신위를 모셨다.

이봉창 의사의 유해는 1945년 5월 15일 조국 땅 부산항에 윤봉길 의사, 백정기 의사의 유해와 함께 도착하였다. 6월 15일 부산 공설운동장에서 추도회가 열렸고, 다음날 영결식이 거행된 뒤 부산역을 떠나 서울역에 도착, 수송정의 태고사에 안치됐다. 7월 6일 세 의사는 국민장으로 모셔져 서울 효창원에 안장되었다.

이봉창 의사에게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